“야, 연단하! 일어나! 슬슬 갈 시간이야!”
“….헉!”
나를 깨우는 동기생의 말에 멍한 표정으로 눈을 뜬 나는, 창틀 밖 어둑어둑해지고 있는 하늘을 보고 금방 정신을 차린 듯 비명을 질렀다.
“얼른 준비해 얼른. 준비물은 다 챙겨 놨어?”
“아아, 대충. 대충은… 이것만 더 챙겨가면 돼.”
몽롱한 정신으로 부리나케 진작 빨아 두었던 붓과 유사 시 참고하기 위해 작게 필사해 두었던 《보천가(步天歌)》(1) 를 챙겼다.
간략하게나마 나를 소개하자면, 성명(姓名)은 연이나(延伊奈). 아까 불렸던 ‘단하(但何)’는 자(字). 관상감에 소속된 천문학 생도로서, 측후(測候)(2)하고 추보(推步)(3)하는 것을 중점적으로 배우고 있는, 그런 신분이다.
이런 상황은 보통 아침에 연출되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면 뭐, 그럴 만하다. 아무리 관상감 천문학 생도라고 해도, 이미 통금 시간도 더 지난 밤에 일부러 모여서 수업을 하지는 않으니.
하지만 오늘은 일 년에 몇 번 없는 귀중한 실습. 그러니까 일반 관원 일을 하고 계신 선배들이 하듯이, 선배들의 관리 감독하에 돌아가며 번을 서고 실력을 미리 시험해 보는 날이다. 이런 걸 매일 하는 게 아니다. 그저 오늘, 하필이면 밤번을 서는 날이 우연히 얻어걸린 것이다. 그러니까…. 오해 없길 바란다.
준비물을 챙겨 지정된 관천대(觀天臺)로 이동. 거기에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연히도 내게 천문학 공부를 권유하신 인생 첫 스승님이 계셨다. 책력을 편찬하는 일을 담당하는 삼력관(三曆官) 중 한 분으로, 최근 서운관지(書雲觀志)(4)를 편찬하신 대단한 분이시다.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갔지만, 스승님께서는 어째선지 화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계셨다.
"어제 모의 시험을 망쳤다면서?"
"에헤헤….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떻게든 화를 풀어 보기 위해 멋쩍게 웃으면서 대꾸했지만 스승님은 여전히 무서운 표정을 감추지 않으셨다. 그랬다. 그런 일이 있었다. 아주 초보적이고 기본적인 질문이었는데도, 천문도 거의 전체를 외우지 않고는 답할 수 없는 문제라 그런지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지금 네 나이라면, 보천가 정도 암기는 되어 있어야 한다. 특히 지금처럼 별을 보아야 하는 날에는 더더욱 그렇지."
앞도 보기 힘들 정도로 깜깜한데, 천문도를 들여다보고 있을 거냐. 뭐 그런 요지였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다시피, 나는 들고 왔는걸.
서방에 화광(火光)과 같은 기운, 맑은 날씨만큼이나 잘 보이는 별들 사이에 간혹 출몰하는 유성. 그 외에 특별한 일은 없었다. 간단한 것들을 기록하고 보고하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밤 3경은 금방 지나갔다. 오랜만의 스승님과의 면담... 아니 실습을 끝내고 나니 정신이 너덜너덜해졌다.
"밖은 통금이겠군."
동 트기 전 새벽. 아무리 밤번을 서는 사람은 항상 있다지만, 밤의 관상감은 낮의 그곳과는 다르게 차갑고 조용했다. 바로 숙소에 들어가서 누울 수도 있었지만, 통금이 풀릴 때까지 시간을 때우고 싶었던 나는 발이 이끄는 대로 어딘가로 가고 있었는데, 그 끝에는 어째선지 익숙한 각석이 있었다.
큰 숨을 들이쉬고서야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새겨져 있는 커다란 돌판을 마주했다. 지난번에 무작위로 뽑혔지만 제대로 외우지 못했던 저수(氐宿)(5) 근처에 손이 멋대로 가 닿았다. 아 그렇지, 이렇게 생긴 그림이었지. 조심스럽게, 아니 무언가를 토해내듯이 나는 머리에서 소원을 뽑아냈다.
그러니까— 바라건대,
다음 시험에선 이 별들을 전부 외우지 않아도 되게 해 주세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눈앞에 천문도만한 빛나는 원이 그려지고, 나는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마치 그곳에 접촉하면 알아서 지식이 흘러들어올 것처럼, 그것은 그렇게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 삐비빅, 삐비빅, 삐비빅.
“어라….”
뭔가 포근한 것에 둘러싸인 감촉, 이 세계에 없던 듯한 색감의 방과 소품, 덮어씌워지고 누군가의 것과 뒤섞인 듯한 기억, 시끄럽게 울리는 높은 타종 소리. 이것들이 그 날 아침 처음으로 마주쳤던 것들이었다.
“꿈인가.”
꿈에서는 어떤 상황에 처하든, 처음 겪는 상황에도 능숙하게 적응해내곤 하지 않던가. 지금 내가 그랬다. 손을 뻗어 시끄럽게 울리는 작은 물건 — 교수님들께 들었던 서양의 시계와 상당히 닮아 있었던 — 을 조용히 시키고, 일어나서 세면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처음 보는 짧은 치마를 입고 옷고름과 살짝 헷갈리는 방식으로 매는 특이한 장식으로 마무리한다.
거울에는 관상감 생도 연이나와 꽤 닮아있지만 조금 세상 풍파를 덜 맞은 것마냥 앳된 이가 서 있었다. 부모의 은덕에 배신하는 양 머리를 짧게 자르고, 고양이 귀가 달린 '헤드폰' 이라고 불리는 괴상한 물건을 머리에 걸치고 다니는 듯했다.
“이것이 나구나.”
라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새로운 몸에 대한 불편감이나 이물감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야 꿈이니까. 나는 빠르게 수긍했다. 이 다음 단계 역시 알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야 한다.
어딘가로 나설 때, 대문 밖으로 나가자마자 하늘을 바라보는 건 어느샌가 생긴 습관 같은 거였다. 어째서 꿈에서도 이런 습관이 남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도 역시 그랬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무채색. 그게 나를 반겼다. 꿈의 나에겐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일 텐데,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당황스러움과 기괴한 느낌에 난 손등을 슬쩍 꼬집었다. 그리 심하지 않은 통증이 뇌까지 전달되어 왔다.
'...어째서지.'
꿈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쯤 되면 절망해도 괜찮은 건가.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걸까. 원래 세계에서의 나는 사고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마지막 기억은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에 손을 댄 그것이었지만, 그 이후 어떤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세계에 최대한 적응하는 것이 나의 살아남을 길일 것이다.
뒤섞인 기억에서 단서를 찾았다. 이 시대의 책력은 인터넷이라는 곳에서 무료로 열람할 수 있는 듯했다. 아니, 애초에 인터넷에 접속하기 위한 조그만 장치에 기본적인 역일(曆日)이 계산되어 내장되어 있었다. 기억을 거슬러 자료를 찾아 보니 이곳은 200년쯤 뒤의 세상이라는 것 같았다.
200년 뒤, 내가 공부하던 하늘에 대한 지식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문득 길거리로 나섰다. 천체투영관이라는 익숙한 말에 이끌려 들어온 어떤 건물의 한켠에는, 그저 보여지는 것 외에 제 기능을 잃은 여러 가지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중에선 내가 직접 사용하던 물건과 유사한 것들도 있어 소소한 충격이 되었다.
그 외에는 이 세계의 천문학 지식들이 짧게 정리되어 있었다. 까만 밤하늘에 총총히 박힌 빛나는 것들에 대해서는, 분명 이 세계로 넘어오기 전까지 공부해왔던 것이 아니던가? 비슷한 단어들이 종종 보이기는 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세차(歲差). 분명 주천분(周天分)(6)과 세실(歲實)(7)의 차이였을 것이다. 알 수 없는 타원 그림과 함께 어딘가 복잡한 설명이 되어 있었다.
오행성(五行星).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분명 다섯 개의 특이한 별이었을 것이다. 목록에 모르는 별 몇 개가 더 추가되어 있었는데, 하나같이 임금 왕(王)자가 들어가 있었다. 각 별들 밑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들과 단어들이 적혀 있었는데, 아마 영축차(盈縮差)(8)나 주율(周率)(9)과 도율(度率)(10) 같은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은하(銀河). 하늘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강이 아니던가? 굉장히 세밀한 빛뭉치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구조가 그려져 있었다.
내가 있던 한양과 같은 곳에서는 밤하늘에 별들이 보이지 않고 그저 어둡게 빛난다고 했다. 그 대신 교육을 위해 먼 지방으로 내려가거나, 이곳에 있는 천체투영 같은 것을 활용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내게 무엇이 남았는가?
내가 가진 지식은 쓸모없는 과거의 유산이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하늘은 결코 빛나지 않는다.
그런 생각으로 울적해하면서도, 나는 무심코 이 시대 연이나의 기억을 헤집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사람이 이곳에서 해왔던 것은 무엇인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무엇이었나? 천문학이 아닌 다른 걸 하라고 하면, 나는 잘 할 수 있을까.
— 전망대의 야경이 그렇게 예쁘대. 도시마다 하나씩 있는데, 안 가면 손해지.
그거라도 보고 생각을 정리해 보자. 마음 깊은 곳이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그곳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갈아타고, 마지막으로 케이블카라고 하는 운송 수단에 탑승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이 정말 많았다. 내가 본래 살던 시대에선 외부인 취급받았던 이양인들도 많이 보였다.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일어났다. 케이블카와 엘리베이터는 나를 아주 높은 곳까지 데려다주었는데, 살면서 이렇게 높은 곳에 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이 시대 연이나의 기억 속에 드물게 있던 경험이긴 했지만, 직접 올라와 보았다고 인식한 것은 말이다.
그곳에서 본 풍경은 정말로 특이했다.
은하수보다 밝은 빛의 흐름이, 낮게 깔린 우주의 거울과 같이 거리에 내려앉고, 사람들은 황홀하다는 듯이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표정들은 어릴 적, 관상감에 입속하기 전 스승님이 보여주었던 별하늘을 보는 나의 표정과 겹쳐 있었다.
그렇구나.
사람들은 여전히 반짝이는 빛을 동경하고 있어.
어두운 과거 위에 힘을 모아 새로운 터전을 쌓고, 새로운 사상과 질서를 갖추고, 누구나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외치는 이 땅에서, 나는 여전히 반짝이는 빛을 좇기로 했다.
오래된 책과 물건들을 찾아 모았다. 나에게도,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구석이 있겠지. 그리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되는 대로 곡을 쓰기 시작한다. 과거의 연이나의 경험을 가지고, 현재의 연이나의 어렴풋한 기억을 녹여내어 할 수 있는 것은 음악뿐.
네 개의 코드와 그걸 아슬하게 지나가는 멜로디. 별과 시간을 노래할 뿐인 서툰 가사. 그것이 지금의 나를 표현하는 몇 가지 단어일 뿐이겠지만.
머릿속의 푸른 초원을, '과거'의 나는 즐거운 듯 누빈다. 그 모습을 뒤쫓으려던 나는 고개를 젓고 결심한다. 이제 그 시절은 내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하고픈 것을, 해야 하는 것을 한다. 설령 아무도 돌아봐 주지 않더라도—
— 연이나(然乀尹)(11), 모르는 세상으로.
Footnotes
보천가(步天歌): 조선 시대 관상감에서 교재로 사용하던, 당대 별자리가 수록되어 암기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시집. '하늘을 걷는 노래'라는 의미로 풀어 쓸 수 있다.
측후(測候): 기후나 천체 현상을 관측하는 것.
추보(推步): 일월오성의 움직임을 예측하거나 계산하는 것.
서운관지(書雲觀志): 조선시대 관상감에 관한 여러 사실들을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기록해 놓은 관상감의 관서지(官署志).
저수(氐宿): 동아시아 별자리인 28수 중 하나로, 순서상으로는 세 번째. 현대 별자리로는 천칭자리의 일부.
주천분(周天分): 1항성년.
세실(歲實): 1회귀년.
영축차(盈縮差): 행성의 타원운동에 따른 움직임의 속도 변화.
주율(周率): 행성의 회합 주기.
도율(度率): 행성의 공전 주기.
연이나(然乀尹): '그러나'의 한문식 표현 및 구결자.